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오해와 편견 (문단 편집) === [[장제스]]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고도 잘 싸우지 않았다? === >최소한의 지원으로 중국을 최대한 이용하려 한 미국은 이러한 모순적인 정책을 결합시켜 오히려 역효과를 키웠다. 스틸웰은 길을 트기 위해 미얀마에 거의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그곳에 배치된 국민당군 사단에 재군비 및 훈련 프로그램을 집중시키면서, 정작 중국 본토에 들어온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장제스의 군대에는 거의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장제스의 군대가 아무리 좋은 무기를 받아도 영양 부족으로 병사들의 체력이 너무 약해 싸울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은 미군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이 처음부터 일본 열도 등을 폭격함으로써 일본의 대응을 유발한 면도 있기 때문에 미군의 항공대 기지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중국군에 떠넘기는 것은 불공평했다. 그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루스벨트]]는 [[B-29]] 폭격기들을 일본 본토 폭격에서 빼내어 중국 지상군을 돕고 싶어하지 않았다. 11월과 12월 B-29 슈퍼 포트리스가 우한에 있는 일본군 보급고를 초토화시킨 것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 앤서니 비버의 대륙타통작전 당시 미국의 태도에 대한 평가 중일전쟁 당시 미국이 중국에게 지원해 준 물자는 이 정도다.[* 주요 물자로 이것 말고도 일부 주긴 했지만 의미 있는 양이 아니었다. 셔먼 전차도 일부 받긴 했다. 단지 주나 마나 한 양이라서 그렇지.] * M3 경전차 100대 * 트럭 25,000대 * 야포 2,053문 - 약간의 105mm와 더 소수인155mm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75mm M1 산포였다. * 소총 305,000정 * 기관총 100,000정 * 철모 146,000개 * 폭격기 151대 * 전투기 679대 * 수송기 120대 * 훈련기 43대 * 식량 33,000톤 * 기타 지원금액 8억 4,500만 달러 무기대여법을 통해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물자라곤 고작 16억 달러 정도였다. 동기간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313억 달러[* 그러나 영국 역시 지불해야 할 대가는 컸다. 미국에게 산업적,경제적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카리브해의 군항들과 캐나다의 군사기지, 더 나아가 전 세계 대영제국의 해군기지들을 미국에 전부 이양하였다.], [[소련]]은 110억 달러 상당의 물자를 지원받았으며, 망명 정부이자 규모 면에서 중국군의 상대도 안 됐던 [[자유 프랑스]]는 중국의 딱 갑절인 32억 달러 상당의 지원을 받았다. 장제스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오히려 [[국공내전]] 기간동안 미국에게 받은 게 40억 ~ 60억 달러 어치였으니 중일전쟁 때에 비하면 화수분급 지원인 셈이다. 사실 미국 또한 중국에게 지원이 더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해안선을 전부 점령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버마까지 함락시키면서 물자를 수송해줄 루트 자체가 없었다.[* 항공기로 수송하는 방안이 있긴 했지만 아주 소량의 물자만 수송 가능한데다 파일럿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험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에 대해 이런 악의적인 선전을 했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관점이 상당한 동의를 얻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거의 받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기사회생한 영국과 소련에 비하면 중국이 받은 지원은 그야말로 병아리 모이급에 그나마도 제대로 분배도 안 됐다. 중국군은 중일전쟁 초기에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원래도 중국은 가난한 농업국가였는데, 그나마 공업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업지대가 동부 해안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에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일본군의 수중에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만주]]를 [[장쉐량]]의 병크로 일본에 내준 거야 그렇다 쳐도 황금 10년 동안 직할령에 기껏 가꾸어 놓은 공업지대를 전쟁 발발 6개월도 안 돼서 죄다 날려먹었으니... 국민당 정부도 눈 뜨고 공장을 적에게 순순히 넘겨줄 바보는 절대로 아니라서 공장 및 기계의 철수 및 소개 전략을 시행했으나, 자본가들의 반발로 인해 [[독소전쟁]] 발발 즉시 죄다 뜯어서 [[우랄 산맥]] 너머로 옮겨버린 [[소련]]과는 대조적으로 얼마 건지지도 못했다. 일례로 상하이 전투 당시 국민당 정부는 상하이에 배치했던 공업력의 2.75%만을 건졌는데 그나마도 군수 공업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핵심 공업력은 다 날아간 상태였다. 더군다나 주요 [[항구]]들이 다 점령당하면서 물자 수입의 길까지 거의 끊겼고, 1938년 10월, 국민당 정부가 육성한 마지막 남은 대규모 군수공업기지인 [[우한]]과 물자 수입의 80%를 담당하던 [[광저우]]마저 함락당할 당시에 중국은 [[관세]] 수입의 91%, [[공업]]의 94%, [[전력]]의 96%, [[방직]] 공업의 75%를 상실해버렸다. 이제 중국에게 남은 물자 수입통로들이라곤 오로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하는 하노이 루트와 영국령 버마를 통한 버마 루트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물자를 제공하는 것은 소련, [[나치 독일]]과 유럽 식민지 뿐이었다. 일본은 [[하이난]] 섬을 점령하고 [[영국]], [[프랑스]]를 압박하여 하노이 루트와 버마 루트를 끊으려 했지만 일본의 무리한 확장에 열받은 영불은 오히려 일본의 눈치를 봐서 두었던 무기 거래 제한을 풀어버렸다. 하지만 중국에게 남은 영토는 [[임시수도]] [[충칭]]을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 뿐이었다. 충칭이 직할시로 승격할 정도의 대도시이긴 하나, 생산력으로 따졌을 때는 동부의 대도시들에게 밀리는 2선급 도시였기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던 것은 여전했다. 거기에 엄청난 숫자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충칭의 인구만 3배 이상으로 늘어난 시점이라 기근까지 겹쳤다. 흔히 미국이 지원한 그나마 있는 무기들마저 장제스 직계군에게 흘러갔다거나 장제스가 그걸 안 줬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무기들은 실제로는 [[조지프 스틸웰]]이 지휘하는 중국군에게 흘러갔으며, 심지어 스틸웰은 [[미 공군]][* 참고로 미 공군(USAF)은 1947년에 창설되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미 공군은 진짜 공군 소속이라는 게 물론 아니고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소속의 중국항공임무군(China Air Task Force - CATF)과 그 후신인 14항공군(14AF)을 말한다.]에게도 이 물자들을 제대로 공유하지 않았다. 장제스조차 손수 굴릴 무기가 없는 마당에 무기를 군벌들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 이 중에서 장제스가 받은 무기는 곡사포 60문과 바주카포 506문, 대공포 몇 대가 고작으로, 그나마도 [[대륙타통작전]]으로 난리가 난 상황에서 스틸웰이 마지못해 양도한 것이다. 중국으로 지원되었다는 물자의 대부분은 중국 주둔 미 공군용 물자이며, 나머지 물량들조차 인도 및 버마 전선으로 파견된 중국군에게 거의 다 전용되었다. 실제로 일본군이 중국에서 국민당군을 탈탈 터는 동안에도 장제스는 스틸웰의 무리한 요구로 인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최정예 부대인 X군과 Y군을 버마 전선에다 돌리고 있었다. 그마저도 통제권은 스틸웰에게 있었고, 연합군은 그들을 그저 소모품 취급할 뿐이었다. 장제스 군대에게 스튜어트가 충분했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장제스가 2차 대전 때 받은 스튜어트 전차는 기껏해야 100대 정도였고, 그나마도 위에도 적혀 있듯이 버마 주둔군에게 다 몰려 있었다. 게다가 스튜어트가 경전차라 한들 분명히 '''전차'''다.[* 사실 미국같이 전차강국 독일과 싸우는 입장에서나 경전차지, 당시 유럽 전선 정도의 대규모 전차전을 경험해본 적 없었던 아시아 보편의 기준에서 스튜어트는 절대 경전차가 아니었다. 아시아 최강의 육군력을 자랑하던 일본 제국조차 스튜어트는 '''막강한 중전차'''인 줄 알았고 실제로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은 스튜어트를 중전차처럼 써먹었다.] 그걸 1940년대 수송기로 히말라야를 넘어 수송할 수 없다. 전차 같은 중장비의 수송은 해로 아니면 육로로만 가능하고, 해로는 개전 이래 쭈욱, 육로는 1942년 버마를 빼앗긴 이후 차단되어 있었다. 전차를 부품으로 분해해서 현지 재조립할 생각이 아닌 이상 중국에게 전차 등 중장비를 지원하는 건 불가능했다. 1944년부터는 공로 완성 및 버마 탈환으로 가능해지긴 하는데, 이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로 유럽 전선에서 전차 수요가 폭발하고 있었다. 다른 경장비류나 일반 물자라면 지원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전차 등 중장비는 마땅히 줄 방법이 없었다. 장제스나 플라잉 타이거스 지휘관 [[클레어 셰놀트]] 준장 등의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조지프 스틸웰 때문에 지원이 형편없었다는 증언에 대해 국공내전의 사례를 들면서 부정하려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스틸웰의 성향이 어쨌거니를 떠나서 중국은 연합국에서 찬밥 대우였고, 위에 수치로 나와 있지만 미국은 중일전쟁 때 중국에게 정말로 물자를 얼마 안 줬다. 랜드리스에 중국 몫으로 책정된 물자는 고작 2%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스틸웰이 쟁여놓질 않나, 영국군이 중간에서 착복하질 않나... 오히려 중일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새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해 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